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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ghtmanpark™ ] Jay's Story Chamber

The Pulitzer Prize Photographs 본문

Pics Chamber/Jay's Stuff

The Pulitzer Prize Photographs

Jay_Park 2010. 6. 29.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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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노벨상’ 퓰리처상

1942~2010년까지의 퓰리처상 수상 보도사진 소개

 

역사를 바꾼 순간 145점

지구촌 주요 뉴스를 한 컷의 영상으로

 

 

<순간의 역사, 역사의 순간 - 퓰리처상 사진전>이 오는 6월 22일부터 8월 29일까지 총 67일간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개최된다. 1998년 <퓰리처상 사진대전: 죽음으로 남긴 20세기의 증언> 서울 전시에서만 당시 파격적인 숫자인 10만여 명의 관람으로 화제가 된 바 있는 퓰리처상 보도사진 부문 역대 수상작들이 지난 4월 12일 발표된 2010년 수상작까지 포함, 한국을 찾는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추가된 1998년 이후 수상작들은 아직도 생생한 국제사회 이슈들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나이로비 대사관 폭발 사건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스캔들(1999년 수상작), 리베리아의 참혹한 내전(2004년 수상작) 등 그 해 최고의 뉴스거리는 물론, 수년간 뉴스에 등장했던 이라크 전쟁은 그 시초가 된 2002년 뉴욕 맨하튼 한복판에서 발생한 세계무역센터 폭발사건으로 시작해 지난 10여 년간 무려 3번이나 퓰리처상에 등장할 만큼(2004년, 2005년, 2006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었다.

 

퓰리처상 수상 보도사진은 지구촌의 주요 뉴스를 한 컷의 영상으로 응축시켜 보여준다. 연도별 수상작을 감상하는 것은 근?현대 세계사를 눈으로 읽는 것과 다름없어, 최고의 사진 작품이 주는 감동과 함께 시사 상식을 익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사진의 예술성과 뉴스 보도의 진정성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현장 학습의 장이 될 것이다. 특히, 모든 사진에는 해당 장면을 포착한 사진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한 설명문구가 따라붙어 당시 상황을 더욱 생생하고 긴장감 있게 느낄 수 있다.

 

마음과 동정심에 호소하여 세상을 움직인 사진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목숨을 건 밀입국 모험을 다룬 2003년 수상작 속 주인공 엔리케의 이야기는 국내에서도 책으로 출간되어 ‘남미판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별칭을 얻으며 화제가 되었다. 2008년,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아이티를 국제사회에 알려 원조가 쏟아지도록 이끌어 낸 사진은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더할 수 없는 명예, 퓰리처상

퓰리처상은 저명한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의 유산 50만 달러를 기금으로 1917년 만들어졌다. 언론?문학?음악 등 3개 분야에 걸쳐 시상하며, 90여 년에 걸쳐 명성을 쌓아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보도사진 부문 수상은 1942년 처음 시작되어, 1968년 특종 사진(breaking news)과 특집 사진 분야(feature photography)로 나뉘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사진기자의 사명, 세상을 바꾸다

퓰리처상을 3번이나 수상한 캐롤 구지가 ‘사진기자란 목숨을 걸고 오지(奧地)로 떠나는 선교사와 같다’라고 말했듯이, 대재해?전쟁 및 사건사고의 현장, 소외된 계층 등을 통해 ‘인간성’의 극한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보도사진들은 퓰리처상을 통해 다시 한 번 전세계에 알려지고 인류의 양심에 경종을 울려왔다.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 마이클 매커 (1990년 퓰리처상 수상)

 

“내가 쓴 기사가 멀리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하고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제임스 B. 딕맨 (1983년 퓰리처상 수상)

 

 

이렇게 온 힘을 다해 기록한 역사를 전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보도사진이 아닐까. 순간의 기록으로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단 한 장의 보도사진을 위해 사진기자들은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마저 버릴 각오로 임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사진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전해 온 사진에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고 내일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는지, 우리의 오늘에 비추어 미래를 열어나갈 혜안을 구해 보는 것은 어떨까.

 

60년 전 6?25 전쟁

위험하고도 처절했던 순간을 포착하다

 

'이 전쟁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 맥스 데스포

 

 

6?25 발발 60주년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잊을 수 없는 위험하고도 처절한 순간이 사진으로 남아 역사를 알려준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퓰리처상 사진전>에는 1951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보도사진 <한국전쟁>이 전시되고 있다. 사진의 무대는 다름아닌,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의 한반도. 국경선인 압록강까지 전격했던 UN군은 1950년 11월 25일, 30만 명의 중공군이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오자 몇 주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게 된다. 12월 4일, 평양을 토기하고 후퇴하기로 결정한 UN군은 곧이어 중공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대동강 철교를 폭파해버렸다.

한편, 숱한 평양 시민들이 공포에 밀려 남쪽으로의 피난길에 올랐다. 남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대동강을 건너야 했는데, 그 유일한 길인 대동강 철교가 폭격을 당한 것이다.

이미 무너지고 있는 대동강 철교조차도 피난민들에게는 절실했다. 보따리 짐을 등에 메고 머리에 이고 자식의 손을 잡고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위태롭게 타고 넘어가는 피난민들. 자칫 발을 헛디디면 얼어붙은 강물 위로 떨어지는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살을 에는 추위, 그리고 거센 바람도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철교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피난민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길을 나선 사람들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직 찍는 일 뿐이었습니다. 어찌나 추운지 군용장갑을 꼈는데도 손가락이 얼어 셔터를 누르기가 힘들었습니다.”

종군 기자로 한국전쟁을 취재 중이던 맥스 데스포의 이 사진은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6?25 전쟁,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전쟁, 카슈미르 전쟁, 중동전, 베트남전 등 모두 6개의 전쟁에 사진기자로 참전한 맥스 데스포는 “내가 비록 전쟁에 강해져 있지만 이 광경은 이제껏 내가 보아 온 것 중에 가장 비참한 장면이었다”고 회상하며 지금도 자신의 방에 퓰리처상 수상 사진을 크게 걸어놓고 있다.

지난 2000년 6.25전쟁 5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국정홍보처의 초청으로 방한했을 당시 그가 말했듯이, 이 아프고 쓰라린 기억의 6?25전쟁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폭탄은 역사를 바꿀 수 없습니다”

 

“너무 뜨거워요, 제발 나를 구해주세요”-9살 벌거숭이 소녀의 기억

 

‘국가 또는 정치 집단 사이의 폭력나 무력을 사용하는 상태 또는 행동.’ 국어사전에서는 전쟁을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72년 베트남의 평화로운 마을 ‘트랑 방’에서 살고 있던 9살 소녀 ‘판 타이 킴 푸크’에게도 전쟁이라는 것이 이것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베트남전이 종전으로 치닫던 1972년 6월, 베트콩들이 소녀가 살고 있던 마을을 점거해 버렸다. 강력한 공격을 가하던 베트남 정부군은 전투가 길어지자 네이팜 탄을 투여하기로 결정한다.

접촉하는 무엇에든 들러붙고 타오르고 또 타오르는 공포의 전쟁무기, 네이팜 탄.

참호 속의 베트콩들을 내쫓기 위해, 비행기들은 저공비행을 하며 네이팜 탄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비행기 하나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불비가 민간인들 위로 떨어졌다.

 

당시 취재 중이던 AP통신 베트남인 사진기자 닉 우트는 섭씨 3천 도에 이르는 네이팜 탄 화염에 불타버린 옷을 정신없이 벗어던진 채 울부짖으며 잿더미가 돼버린 집을 뛰쳐나오는 소녀를 포착한다.

사진을 찍자마자 기자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벌거숭이 소녀’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턱의 살이 녹아 가슴에 붙었고 왼팔 역시 아예

가슴에 붙어버린 소녀는 14개월 동안의 입원과 17번에 걸친 피부 이식 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소녀는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닉 우트가 찍은 사진은 ‘전쟁의 테러’

라는 제목으로 베트남전의 참상을 전세계에 고발하며 1973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것이다. 전쟁이 무엇인지조차 생경했던 어린 소녀가 폭력에 말려든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전쟁 중에는 어느 곳도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한때 베트남 공산정권의 홍보용으로 이용되기도 한 푸크는 이후 캐나다로 망명했다.

“폭탄은 역사를 바꿀 수 없다”고 강조하며 반전활동을 해 온 그녀는 1997년, 유엔 평화대사로 임명받았으며 미국 시카고와 캐나다 토론토에 ‘킴 재단’을 만들어 전쟁에서 희생되는 아이들을 돕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한 장의 사진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잊지 말자고. 그 어떤 폭탄보다도 강력한, 사랑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6월 22일부터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퓰리처상 사진전>에서는 이 ‘벌거숭이 소녀’의 사진을 포함한 145점의 퓰리처상 수상 보도사진들이 사진이 가진 ‘세상을 바꾼 힘’을 되새겨주고 있다.

 

퓰리처상, 그 장면 이후

 

사진기자에게 최고의 명예인 ‘퓰리처상 수상’을 안겨 준 장면, 그 이후의 장면이 해피엔딩인 경우도 많지만, 가슴 속에 남아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결말도 많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처절한 전투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오지마 섬. 일본군의 폭격 속에 마침내 미국 해병대가 섬의 남쪽 끝에 있는 수리바치 산을 장악하고, 기쁨에 찬 성조기 게양장면이 카메라에 기록되었다. 사진 속 해병대원 6명 중 3명은 계속된 이오지마 전투에서 전사하고 절반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영웅 대접을 받으며 본토로 소환되어 전쟁 채권 발매 촉진 선전요원으로 동원되었다고 한다.

순식간에 2만 5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콜롬비아의 화산폭발 당시, 구조대원이 턱까지 물에 찬 소녀를 구하려 애쓰는 장면이 카메라에 담겼다. 소녀는 결국 구조되지 못했으나 당시의 구조장면은 이듬해인 1986년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화염에 싸인 6층 건물에서 구조 사다리가 닿기 직전 추락해버린 여인과 아이를 찍은 1976년 수상작의 순간 포착 이후 여인은 목숨을 잃었으나 아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1989년 수상작 속에서 소방관 품에 안겨 인공호흡을 받고 있는 어린 생명은 즉시 아동병원으로 옮겨졌으나 6일 후 세상을 등졌다.

 

아슬아슬하고 안타까운 결말은 이러한 순간을 포착한 사진기자에게도 종종 있어왔다.

 

극적인 순간을 포착한 사진기자 중 퓰리처상 수상 이후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 이도 여럿 있다. 이 중에는 사진을 통해 전세계에 호소하고자 했던 기자정신이 자신에게는 되려 독이 되어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한복판에서 취재 중이던 쿄이치 사와다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4년 후인 1970년, 동료와 함께 캄보디아 전쟁을 취재하러 나섰으나 현지도착 다음날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1971년 방글라데시의 탄생 과정을 취재한 호스트 파스와 미첼 로런트는 총검이 난무하는 성난 군중 속에서 사진을 찍었다. 4년 후 베트남에서 취재 중이던 미첼 로런트는 매복 중이던 군인에 의해 살해당했고, 호스트 파스는 방글라데시에서의 경험을 회상하며 “우리의 목적은 사진을 통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체성과 사명감으로 고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도 있다.

굶주린 수단 어린이와 때를 기다리는 독수리를 사진에 담은 1994년 수상자 케빈 카터. 퓰리처상 수상으로부터 불과 며칠 후, 그의 절친한 친구인 켄 우스터브?p이 취재 중 살해를 당했다. 소식을 들은 케빈 카터는 ‘살해와 분노와 고통, 굶어죽어가거나 상처입은 아이들, 미쳐 날뛰는 사람들… 이런 것들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나를 떠나가지 않는다’고 말하며 보도사진 기자로서의 힘든 심경을 토로했다. 더군다나 ‘왜 아이를 먼저 구하지 않았냐’는 숱한 비난은 구경꾼이 되지 않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던 그에게 실로 참기 힘든 것이었으리라. 결국 퓰리처상을 수상한 그 해, 33살의 나이로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 속의 독수리와 아버지를 동일시했다. 그러나 내게는 아버지가 독수리의 공격 속에 속수무책으로 놓여 있었던 소녀였고, 독수리는 이 세계로 보였다’라고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딸 메건이 케빈 카터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다.

 

기자 정신, 퓰리처상에서 그 종점을 찍다

 

순간을 기록하여 역사를 남긴다는 사진기자의 투철한 직업정신은, 단 한 장의 사진을 담기 위한 과정을 알고 보면 더욱 뭉클하게 다가온다. 1990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마이클 매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렇게 온 힘을 다해 기록한 역사를 전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보도사진이 아닐까.

 

 

퓰리처상을 수상한 사진기자의 취재담을 들어보면, 올림픽 취재 중 새벽부터 화씨 100도가 넘는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관중석 아래에 자리잡고 한 순간만을 기다려 원하는 장면을 얻어내는가 하면(1985년 수상, 오렌지 카운티 레지스터지 기자단), 카스트로의 총살 집행 장면을 찍다 필름을 요구하는 검사를 엉뚱한 필름으로 따돌리고 아슬아슬하게 현장을 빠져나오기도 했다(1960년 수상, 앤드루 로페스).

 

 

누구도 강요한 적 없지만, 더러는 목숨을 담보로 취재에 임했다.

  

 

토벌단에 잠입해 무법상을 촬영하기도 하고(1978년 수상, 로스 버그만), 비행기 조종사가 ‘더는 머무를 수 없다’고 돌아서려던 순간까지도 2백 년 만에 나타난 최악의 눈폭풍을 전하고자 하기도 했다(1979년 수상, 보스턴 헤럴드 아메리칸지 기자단).

베트남 전쟁의 한복판에서 취재 중이던 쿄이치 사와다는 미군 비행기로부터 폭격당한 마을의 사람들이 강을 건너 피난 가는 동안, 살기 위해 헤엄쳐가는 두 가족을 보았다. 그는 사진기를 들어 물 밖으로 아이를 들어 올리려 애쓰는 어머니, 공포와 고통을 눈망울에 담고 있는 겁 먹은 소년의 모습을 담아 1966년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후 사진 한 장만을 달랑 들고 이 두 가족을 찾아내어 각 가족에게 상금의 절반씩을 나누어주는 훈훈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4년 후, 동료와 함께 캄보디아 전쟁을 취재하러 나섰으나 현지도착 다음날 베트콩에 의해 살해된 채 발견되어 세상을 안타깝게 했다. 그의 나이 불과 34세였다. 언제든, 어떤 곳이라도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치 않았던 쿄이치 사와다를 두고 그의 한 동료는 ‘그의 재능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회상한다.

1980년 ‘이름 없는 사진기자’에게로 돌아간 퓰리처상은 2006년에야 주인을 찾았다. 이란의 무자비한 학살 장면을 찍은 이 사진기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당시 이란 에텔라트지는 익명으로 기사를 보도했고, 기자는 16년이 흐른 후에야 ‘더이상 숨을 이유가 없다’고 세상에 인사를 했다.

 

순간의 기록으로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단 한 장의 보도사진을 위해 사진기자들은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마저 버릴 각오로 임하는 이들의 직업정신에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이렇게 탄생한 보도사진의 정점을 퓰리처상 사진전에서 느껴보기 바란다.

 

퓰리처상 사진 속 대통령

  

주요 사건을 다루는 보도사진의 정점에 있는 퓰리처상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관심을 받는 인물인 대통령이 등장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퓰리처상 사진이 잡아 낸 대통령들을 소개해 본다.

 

 

(사진 크레딧)

대통령 후보의 신발 밑창에 구멍이 났다. 1952년, 미국 제34대 대통령인 아이젠하워의 경쟁후보였던 민주당 스티븐슨 아들라이의 이야기이다. 이후 아들라이는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퓰리처상 수상소식에 ‘홀인원으로 우승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라며 특유의 유머와 재치를 담은 전보를 보내왔다고 한다.

다음 대통령인 존 F. 케네디가 외교 정책에 조언을 얻고자 아이젠하워를 만났을 당시 두 지도자의 고독하고도 진지한 뒷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아이젠하워는 다시 한 번 퓰리처상에 등장했다.

 

 

아이젠하워와 함께 사진에 찍힌 2년 후, 케네디 대통령은 총살로 암살당하고 그 용의자를 역시 총살을 당하게 된다. 용의자가 총살당하는 장면은 카메라에 생생히 담겨 196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지며 종결되었다.

실패로 끝난 암살 기도 장면이 카메라에 여실히 잡히기도 했다. 바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암살 미수 사건이었다. 대통령이 보이자 한 명은 셔터를 눌렀고, 한 명은 방아쇠를 당겼다. 대통령을 포함한 4명의 총상자는 다행히도 목숨에 지장이 없었고 셔터를 눌렀던 론 에드몬즈는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6년 만의 이미지 반전

후보 시절 어린이와 함께 턱을 괴고 대화를 유도하는 사진으로 퓰리처상 소재가 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누구와도 편안하게 대화를 이끌어낸다는 평가에 날개를 달아 준 이 사진은 그러나, 클린턴이 재임기간 중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다시 한 번 퓰리처상에 등장하게 됨으로써 초심을 유지하고 유권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준다.

 

  

2009년 퓰리처상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도전하는 오바마가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장면을 포착하였다. 경쟁 후보인 존 매케인이 굳은 날씨를 이유로 불참했던 한 집회에서 강인함과 결단력 있는 모습을 보여 준 오바마는 결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춤추는 옐친 대통령

1996년, 재선에 도전하며 각종 달콤한 정책을 내세우던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언론을 이용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록 콘서트 무대에서 춤추는 모습까지 연출하게 된다. 결과는 성공. 1차 선거 결과는 무척이나 근소했지만 결선 투표에서 옐친은 경쟁자인 주가노프를 물리치고 재임을 결정지었다. 춤추는 옐친 대통령의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알렉산더 젬리아니첸코는 “옐친과 수상 영광을 나눠야 할 것 같다”고 위트 넘치는 수상소감을 말하기도 했다.

 

사진 속 아이러니

부패로 점점 삐그덕거리는 마르코스 정권이 필리핀을 쥐락펴락하던 1986년. 선거를 조작한 마르코스 정권은 몇 주 지나지 않아 군부가 야당의 아키노 편으로 돌아서며 실각되었다. 마르코스의 마지막 대중 연설 장면을 찍고자 했던 코메니치는 의외의 장면을 발견해냈다. 라유니온 지역 원주민들이 마르코스의 영혼을 몰아내기 위해 마르코스 조각상에서 의식을 벌이는 장면이 바로 그것. 실각하는 마르코스 정권과 거대한 조각상에 모여든 사람들이 보여주는 아이러니는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퓰리처상은 사진기자만의 전유물이다?

 

정답은 ‘아니오.’ 대부분의 퓰리처상은 사진기자에게 돌아갔지만, 전문 사진기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퓰리처상을 수상한 비전문가도 여럿 있었다.

 

1947년, 아마추어 카메라맨 아놀드 하디는 파티를 즐기고 귀가하던 중 소방차 소리에 카메라를 집어들고 택시를 탔다. 화재 현장인 와인코프 호텔은 이미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담요로 밧줄을 만들어 내려오는 사람,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는 사람 등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사진 속 추락하고 있던 여인은 다행히도 파이프와 철근이 쌓여 있는 곳에 떨어진 덕에 목숨을 건졌다. AP통신을 통해 보도된 이 사진으로 아놀드 하디는 아마추어 사진가로는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퓰리처상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뉴욕행 버스 티켓을 살 돈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 하디는 전문 사진가가 되는 대신 의학 장비 설계회사를 차렸다. 이제는 그마저도 은퇴한 그는, 그의 행보에 대해 의아해하는 이들에게 그저 “나는 충분히 즐기고 살고 있답니다”라고 말한다.

 

 트럭이 아슬아슬하게 다리 난간에 걸쳐진 사진으로 195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버지니아 쇼우는 훨씬 평범한 경우이다. 함께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극적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한 잡지의 주간 사진 경연대회에서 10달러의 상금을 받고자 상기시켰고, 이 날 찍은 사진은 경연대회 뿐만 아니라 퓰리처상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서 퓰리처상 보도사진 부문 역사상 첫번째 여성이자 두번째 아마추어 사진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녀가 찍은 사진은 심지어, 일반 카메라로 찍은 첫 수상작이었다.

 

 

사진 저널리즘을 공부하던 학생이 수상한 경우도 있다. 1970년 오하이오 주의 켄트 주립 대학 인근 맥주집에서 시작된 토론이 8백 여 명의 시위로 번지고 집회가 시작되었다. 방위군의 사격에 13명의 학생이 부상당하고 4명이 죽었지만 아무도 유죄를 선고받지 않은 이 사건은 이 학교 학생 존 필로의 사진이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세상에 호소하게 되었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존 필로는 퓰리처상 수상 이후 그의 영웅인 에디 아담스로부터 축하전보까지 받았다. 그리고 그의 꿈을 이루어 AP통신,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 뉴스위크 등의 언론사를 거쳐 현재 CBS 텔레비전의 사진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퓰리처상 수상을 계기로 프로로 등극한 아마추어로는 찰스 포터도 빼놓을 수 없다.

숱한 사상자를 낸 오클라호마 정부 청사의 화재폭발 현장에서 당시 평범한 은행원으로 일하고 있던 아마추어 카메라맨 찰스 포터는 한 살 박이 아기를 안고 나오는 구조대원이 멍하니 아기를 바라보며 안고만 있던 순간을 찍었다. 구조대원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묻어난 이 사진은 1996년 퓰리처상을 수상하였으며, 이외에도 숱한 보도사진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1982년 퓰리처상 수상자인 존 화이트가 “차에 항상 카메라를 준비해 둘 것”이라고 조언해 준 덕에 퓰리처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여긴다.

이처럼, 세상에 메시지를 던지는 사진은 사진기자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카메라맨, 심지어 일반인도 찍을 수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세상에 알릴 준비만 되어 있다면 말이다

 

퓰리처상이 보여주는 흑과 백의 융화 과정 

 

인종 차별 문제는 다문화 국가라면 어느 나라에서나 품고 있는 숙제 중 하나이다. 특히나 흑과 백의 대립으로 오랫동안 사회적 문제를 앓아 온 미국에서 그 융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퓰리처상을 통해 알아보자.

 

풋볼 경기 중 백인 선수의 흑인 선수 가격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사진은 순식간에 여러 신문 및 잡지를 통해 알려졌고,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기도 하는 등 미국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1952년 퓰리처상까지 수상하였다. 피해자였던 흑인 선수는 이 사진을 “야만적인 대우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준 사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이후 퓰리처상은 1976년 흑백 학군 통합을 알린 사진으로 변화하는 미국 사회를 조명하게 된다. 흑인과 백인이 다른 학교를 다니던 시절 흑인과 백인이 같은 학교에 다니도록 학군을 정리한 것은 큰 이슈가 되었다.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듯 모두들 조마조마했지만 부모들의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학생들은 통학버스에 올랐고, 학군 통합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변화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정신’을 실천한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2009년의 퓰리처상은 변화된 미국 사회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미국 사상 첫 흑인 대통령에 도전하는 오바마의 강인한 모습을 포착한 사진에 퓰리처상이 돌아간 것이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사람은 모두 같을 뿐 색깔논쟁은 이제 의미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인간성의 본질을 찾아

 

퓰리처상 수상사진을 찬찬히 보노라면, 대체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인지 선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목숨을 걸고 사진 한 장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한 사진기자가 있는 반면, 너무나도 순식간에 목숨이 사라지는 순간 역시 존재한다.

 

 

거리에서 베트콩 포로를 즉시 총살해버리는 사진 한 장. 이 사진 한 장이 많은 미국인이 반전으로 돌아서게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사진 속 베트남 장군이 평생을 비난 속에 살아가게 만들었다. 이 사진으로 1969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애덤스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돈을 받고 있었다니”라고 편치 않은 마음을 고백하였다. 세상을 세상에 알리는 것, 그 본분을 다하고도 여전히 정체성을 고민하는 보도사진 기자의 영원한 숙제는 아직도 그를 괴 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사진이 오해 받고 있다고 여겼다. “당신이 이 장군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동료들을 죽인 사람을 붙잡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그는 되묻는다. 상황에 처해 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스스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현실, 그게 바로 전쟁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반면, 생명의 고귀함을 일깨워주는 사진도 있다.

1973년 수상작은 생명 탄생의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하여 그 환희와 감동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 무참하게 쓰러져 가는 생명을 담은 베트남 전쟁 취재사진이 퓰리처상 수상사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1960~1970년대의 수상작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이건 아마도 퓰리처상 선정 위원회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아닐런지.

  

가슴 가득 온기를 채워주는 사진은 이전에도 있었다.

퍼레이드를 좀 더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어 보도에서 내려 온 소년에게 경찰관이 허리 굽혀 눈높이를 맞추어 설득하는 1958년 수상작은 순진무구한 소년과 이를 존중하며 설득하는 경찰관 간에 흐르는 온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면을 포착한 윌리엄 비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해군과 함께 움직이며 오키나와 전투 등을 취재한 전쟁 사진가였다.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히 전하던 그 역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따뜻함을 들추어내고 싶었던 것일까. 이 사진은 사진이 실렸던 워싱턴 데일리 뉴스지 역사상 최고의 찬사를 받은 사진으로 평가받았다.

 

“신문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 교사”라는 퓰리처상의 창시자 조지프 퓰리처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언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퓰리처상 수상작들은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의 내면 깊은 곳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고 있다.

출처 : 맥스티켓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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